개미 56호
개미 땅속에 개미가 집을 짓는다대들보를 끌고 들어가고기둥감을 물어 나르고사람이 사는 기슭에이고 진 개미들이 줄을 서 들어간다 밟히고 빼앗기는 멸시를 피해척박한 지상 아래성을 쌓는 그들만의 영토 한 걸음 한 걸음캄캄한 굴속…
고로쇠나무 55호
고로쇠나무 지리산고로쇠나무 얼어붙은 길을 녹이는 햇살 좋은 날물 한 동이 내어놓아마을 잔치 벌어졌다 겨울잠 덜 깬 반달곰이랑 목청 가다듬는 개구리아지랑이 산책하는 나비도 볼딱지 퍼렇게 언 진달래한 사발씩 목을 적시고 있다…
누란의 미인 54호
누란의 미인 기다린다고 했었지몇천 년이 지나도기다린다고 했었지 낙타에 젊음 싣고멀리 떠나버린 나를기다린다고 했었지 초원의 달빛에 취해서향유고래를 타고파도를 넘나들다가너와의 약속 잊어버렸다 미안하…
푸조나무 교실
푸조나무 교실 먼 옛날서라벌에서 오신고운 최치원 선생이 짚고 온 지팡이 꽂아 놓고신선이 되어 입산하셨다는데선생의 말씀인 듯푸조나무 지팡이 뿌리내려 천년 세월 열매 다디달아그 나무 곁에 왕성 초등학교 세우고아이들은 입안 가득 우물거려점점점 까망 말씀을 가…
잃어버린 행성 52호
잃어버린 행성 고성 바닷가 벼랑에서일억 년을 써내려 온퇴적의 경전을 보았네바스러질 듯행간마다 살다 간 생명의 장엄한 흔적 모래알 하나하나 들추어바다가 읽어주었네천년 전 천만년 전열 길 퇴적을 읊조리는 포말을 따라들어가다가일억 …
우물 속 우주 51호
우물 속 우주 바다가 넓은 것일까호수가 작은 것일까소 구유만 한 어항에금붕어가 헤엄친다 저 외진 영혼은넓은 호수를 알까바다를 상상할까먹이를 달라고 삐죽 내미는 주둥이바글바글 기포기 산소를 마시며연애하고 산란하고 또송사리 태어나…
불구경 50호
불구경 지상 최강의 동물이이웃에게발톱을 드러냈다 날갯죽지 부러진 새가 퍼덕인다 털빛이 다르다고먹는 것이 맘에 안 든다고제 영역을 쳐다봤다고날카로운 발톱으로 움켜쥐고부리로 쪼고 있다 둥지가 무너지…
범왕 마을 49호
범왕 마을 성벽도 망루도 없는 산중에대궐터가 있습니다앞산 뒷산 높아전략적 요충지 같지만아무도 탐내지 않는산골 마을입니다 다스릴 백성은 산짐승들이요말 없는 초목들뿐인데가야국 김수로왕이 계셨다는대궐터가 있습니다 산세가 좋아 …
다육이 48호
다육이 물 한 동이 길어 20리 길 걸었다지땡볕에 신발도 없이길어온 물은머금고만 있어도 싶게 말라 갔겠지 아가, 여기는 물이 흔하단다물동이 내려놓으렴 먼 사막에서 시집온 아이사방천지 물인데볼따구니 가득 머금고 …
돌부처 47호
돌부처 어릴 적 뒤집어 가재 잡던 바윗돌이인고의 세월세찬 물길에 닳아 조약돌이 되었나요 냇가에 갔다가유난히 눈에 밟히는 조약돌 하나 주워 왔네요각진 모서리 다 내어주고반짝이는 사리만 남았네요 그날당신이 온정으로 품고 있던…
권위의 의미 46호
권위의 의미 층층이 얼어붙은나무의 뿔을 봅니다 꽃피우고 열매 맺어벌레와 새들을 부르던풍요의 뿔이었지요 고단한 눈송이 쉬어가는 뿔 위에새들이 포르르 날아와볼 비비고 있습니다지난여름 고마웠다고,야윈 발가락으로 토닥…
서산대사 길 45호
서산대사 길 화개골탁발한 부처님 말씀을 짊어지고냇물에 도성의 추억을 씻어내며비탈진 숲속 생명의 경전을 들으며삭발한 젊은 서산이 오르던 길젖 물리고 어깨 다독이는 길부처님 말씀처럼 깊고 높아삼보일배 마음으로 정신수양하며 걸었을 길 …
칠불사 44호
칠불사 신화의 왕국 가야에는말갈기 휘날리며 김해 초원을 질주하는일곱 왕자가 있었다지도읍지 아리따운 처녀들 흠모하는용맹한 전사를 꿈꾸던 왕자들은허공을 나는 활시위 놓고비단 이불 속 잠자리에 들면밤마다 무량한 음성 들었다지지리산으로 찾아오라는 화…
금계국 43호
금계국 노랑 저고리에연두색 치마너무나 흔해 주목받지 못하는 꽃어디서 왔는지냇가에도 길섶에도 함부로 피어손을 흔들고 있다. 땡볕에 환한 미소 거기 있었지콩밭에도 보리밭에도봄이면 고사리 꺾고 가을이면 알밤 주우며호…
잃어버린 보리밭 42호
잃어버린 보리밭 눈발이 휘날리는 하얀 차꽃을 보다가보리 누룽지처럼 뼈가 아려왔네 녹차 맛이 깊다니범왕용소처럼 깊다니 보리밭 터 차나무는누렇게 익어갈 줄 모르고사계절 청춘을 이야기하네만 나도 늙고 누이도 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