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은 지키라고 있지 74호
규칙은 지키라고 있지 문방구 앞 두더지는 모가지가 없지모가지가 없어 슬프지 않지모가지가 없어 아프지 않지 어쩜 이토록 망치가 빠를 수 있지어쩜 비명이 경쾌할 수 있지 무얼 잘못한 건지 알 겨를도 없지곰곰 반성할…
가뭄 74호
가뭄 물 빠진 자리가 궁금해 걸어 들어갔다캄캄한 뻘밭듬성듬성 허리 휜 수초가앓아누워 있고현생이 즐겁다고 너울너울춤추던 물고기 보이지 않는다속 텅 빈 우렁이 껍데기 몇 개허기진 소리로 울고물기 마른 갈증이 스쳐 가는 고요낮이면 햇살이 내려오고밤…
일진 73호
일진 저마다 주검을 입에 물고멀리 날아가는 까마귀 떼 짙게 드리웠던 아침 안개가서서히 간밤의 일을 들추고 있다 길은 알았다는 듯이맨몸을 드러내며 검게 늘어져 있다 내가 본 광경은 나와는 무관한 …
멸국 73호
멸국 밑동이 잘려나간 그루터기에어린묘목인 듯 곁가지가 돋아났다 시간이 시간을 추월하는 어긋난 공간 거대한 육신을 먹여 살리던 뿌리들은쟁기를 놓고 공장은 문을 닫고물 깃던 두레박은 말라가리라 잔뿌리 몇몇이 옛 영…
북국새 72호
북국새 아무래도 실향민일 테다고향을 그리다 죽은 원혼일 테다분명 좌편향일 테다한번 싸워보지도 못한이 산 저 산 헤매다 굶어 죽은파르티잔일 테다누구도 부르지 못하는 이름으로죽어서도 땅 한 뼘 얻지 못한어린 소년이 어여쁜 소녀가 한 많은 여인이늙…
유기견 72호
유기견 바닷가에서 묻어온 모래가밤새 서걱 이고 있다 파도소리 버리고인간의 발바닥에 매달려 온 먼 여행어젯밤 오들 거리던 서리는 벗어났지만내방 한켠에서 숨을 허덕거리고 있다 작은 호숫가에서태평양 파도 바람도 잊은…
저녁 풍경 71호
저녁 풍경 개미 한 마리가제법 쌀쌀해진 바람을 타고제 몸보다 큰 나비를 데리고 갑니다먹고 사는 일이 온통 바닥을 기는 일인데오늘 밤 저 개미는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꿈을 꾸겠습니다 달력의 마지막 숫자가 여름을 거두는 저녁길목마다…
건어물 71호
건어물 더 이상 오를 수 없다바다생명이 살 수 없는 한계선 파도가 모래톱을 기어오르다 무너지고푸른 나뭇가지에 매달리다 주저앉는벼랑 멸치랑 고래는은하의 이쪽 미지의 생명에게말을 걸고 싶었겠지봄이면 아까시꽃 향기 …
낚시 70호
낚시 으스름 저녁이 와서요사방에서 도란거리는 소리가 나서요하루를 무사히 보냈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요전화 소리 문자 소리 고양이 소리 개 짖는 소리소리에 딸려 나온 초승달이 보일 듯 말 듯 걸려 있어서요장난삼아 별 하나를 걸어 바다에 던져보는 …
패러글라이딩 70호
패러글라이딩 새의 날개를 빌려 허공을 걸어보자고무작정 날아오를 수 없어날갯짓 대가를 발품으로 지불하는 등반뼛속 공기를 채우지 못한 무거운 육신은연어가 여울목 거슬러 오르는 걸음보다 더디게언덕을 올라허공을 자맥질 한다지상을 버리고 헤집는 날갯짓중력 잃은 …
파랑 69호
파랑 입술부터 파랗게 물들이는 말이 있어파란 새파란 푸른 짙푸른 퍼런 시퍼런이런 빛깔은 어두울수록 생생하게 피어나비스듬히 넘어가던 말도 일제히 솟구치게 하거나그 힘으로 나아가는 것이어서시도레미 도시라솔 파가 없으면 노래는바람 빠진 타이어거나 …
하와이 연가 69호
하와이 연가 파도 하나쯤가슴속에 감추고 살아도 괜찮겠지난바다가 넘실거리는천 길 물속이 무섭겠지마는 그 속에도고래도 있고 새우도 있고 집 한 채 지고 다니는조개도 있지 않겠나 사탕수수밭에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지잿…
귀가 68호
귀가 비 내리는 밤길을 달린다앞서가는 차도 뒤따르는 차도 없다앞서거니 뒤서거니 추근대던 달도 없다길은 젖어 번들거린다검은 뱀 같다뱀은 마을을 삼키고 산모퉁이를 삼키고나를 삼키고 구불구불 간다출구가 보이지 않는 길을 간다저승으로 가는 길이 이럴…
비린 소나기 68호
비린 소나기 마른 물고기가 헤엄친다물고기보다 황새다리가 더 깊어지는 가뭄깊이란 깊이는 다 소멸되고 어두워부레를 내려놓고지느러미 내려놓고 비늘도 벗어놓고 먹구름 타고 비를 뿌린다잃어버린 과거로부터너무나 흔해서 흘러 보낸하늘저수지…
고라니 67호
고라니 적막한 산길에서 우연히 만난고라니가 묻는다왜에 ― 왜에 ―먼지같이 날리는 눈발을 맞으며핏대를 세워서 묻는다가늘고 긴 다리를 짱짱하게 세우고 묻는다나는 답을 할 수가 없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고라니가 떠밀려간다왜에 ― 왜에 ―물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