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그리움 77호
둥근 그리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며 넓적한 손바닥을 펴서 수없이 어루만지던 지나가는 발걸음 소리에도 괜히 예민해 하던 딸 가진 엄마의 그 마음 같아서 달항아리처럼 동그랗고 불안한 내 마음 같아서 퇴근길 마트에서 엄마 같은 딸 같은…
낡은 파라솔 77호
낡은 파라솔 햇살과 빗줄기를 막아주던 그가 팽팽한 긴장을 놓아버렸다 사랑을 잃어버린 그는 앙상하게 말라간다 깡마른 손등과 볼딱지엔 힘줄이 툭툭 불거지고 손을 흔들며 입은 웃고 있어도 눈빛이 흔들린다 높아진 하늘 서늘한 기운에 귀뚜라미 소…
몽유도원도 76호
몽유도원도 저 눈썹 아래 입술은생략에 생략이 겹친 겹겹의 산뒷고기처럼 빼돌린 그리운 시간구름 비 폭풍 폭설 다 빼돌린 채한사코 시치미를 떼는 저 산은아직도 봄일까 어느새 겨울일까내가 알지 못하는 계절의 바깥일까그때 내가 날려 보낸 그 새는저 …
가을 앓이 76호
가을 앓이 수초 사이에서도깊은 수심에서도뜨거운 지난여름목을 축여주던 너였는데땀을 씻어주던 너였는데덥다고 투정부리면달래주던 너였는데 너의 체감이 서서히 식어간다붕어는 너의 품 깊숙이 숨어들고너를 마시는 한 사발의 온기가가슴 울먹한 쓸쓸함이 …
시든 꽃 75호
시든 꽃 시든 꽃을 보는 일은제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꺼림칙하다 시든 꽃에서는싱싱한 꽃에서 맡을 수 없는,냄새도 아니고 향기도 아닌거덜 난 영혼의 냄새가 난다 풀숲에 던져놓은 국화 다발에벌떼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가을로 유영한다 75호
가을로 유영한다 소금기 없는 하늘높아도 얇아도 변함없는무심 속으로 고추잠자리 헤엄친다 나뭇잎도 따라 날고 싶어자꾸만 팔랑이는 수심눈시울 붉어지고 얻은 만큼 내려놓아야 하는적멸의 허공을와르르 무너뜨리고날아드…
규칙은 지키라고 있지 74호
규칙은 지키라고 있지 문방구 앞 두더지는 모가지가 없지모가지가 없어 슬프지 않지모가지가 없어 아프지 않지 어쩜 이토록 망치가 빠를 수 있지어쩜 비명이 경쾌할 수 있지 무얼 잘못한 건지 알 겨를도 없지곰곰 반성할…
가뭄 74호
가뭄 물 빠진 자리가 궁금해 걸어 들어갔다캄캄한 뻘밭듬성듬성 허리 휜 수초가앓아누워 있고현생이 즐겁다고 너울너울춤추던 물고기 보이지 않는다속 텅 빈 우렁이 껍데기 몇 개허기진 소리로 울고물기 마른 갈증이 스쳐 가는 고요낮이면 햇살이 내려오고밤…
일진 73호
일진 저마다 주검을 입에 물고멀리 날아가는 까마귀 떼 짙게 드리웠던 아침 안개가서서히 간밤의 일을 들추고 있다 길은 알았다는 듯이맨몸을 드러내며 검게 늘어져 있다 내가 본 광경은 나와는 무관한 …
멸국 73호
멸국 밑동이 잘려나간 그루터기에어린묘목인 듯 곁가지가 돋아났다 시간이 시간을 추월하는 어긋난 공간 거대한 육신을 먹여 살리던 뿌리들은쟁기를 놓고 공장은 문을 닫고물 깃던 두레박은 말라가리라 잔뿌리 몇몇이 옛 영…
북국새 72호
북국새 아무래도 실향민일 테다고향을 그리다 죽은 원혼일 테다분명 좌편향일 테다한번 싸워보지도 못한이 산 저 산 헤매다 굶어 죽은파르티잔일 테다누구도 부르지 못하는 이름으로죽어서도 땅 한 뼘 얻지 못한어린 소년이 어여쁜 소녀가 한 많은 여인이늙…
유기견 72호
유기견 바닷가에서 묻어온 모래가밤새 서걱 이고 있다 파도소리 버리고인간의 발바닥에 매달려 온 먼 여행어젯밤 오들 거리던 서리는 벗어났지만내방 한켠에서 숨을 허덕거리고 있다 작은 호숫가에서태평양 파도 바람도 잊은…
저녁 풍경 71호
저녁 풍경 개미 한 마리가제법 쌀쌀해진 바람을 타고제 몸보다 큰 나비를 데리고 갑니다먹고 사는 일이 온통 바닥을 기는 일인데오늘 밤 저 개미는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꿈을 꾸겠습니다 달력의 마지막 숫자가 여름을 거두는 저녁길목마다…
건어물 71호
건어물 더 이상 오를 수 없다바다생명이 살 수 없는 한계선 파도가 모래톱을 기어오르다 무너지고푸른 나뭇가지에 매달리다 주저앉는벼랑 멸치랑 고래는은하의 이쪽 미지의 생명에게말을 걸고 싶었겠지봄이면 아까시꽃 향기 …
낚시 70호
낚시 으스름 저녁이 와서요사방에서 도란거리는 소리가 나서요하루를 무사히 보냈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요전화 소리 문자 소리 고양이 소리 개 짖는 소리소리에 딸려 나온 초승달이 보일 듯 말 듯 걸려 있어서요장난삼아 별 하나를 걸어 바다에 던져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