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현수막, 주민 탓하기 전에 게시공간부터 늘려라
본문
77호
<기고>
불법 현수막, 주민 탓하기 전에 게시공간부터 늘려라
하동군, 단속 중심에서 수요에 따른 예방 행정으로 전환해야
정영섭 전 하동군의원
하동군 읍·면 곳곳에서 현수막 게시를 둘러싼 주민과 행정의 갈등이 반복되고 있다. 주민과 사회단체, 상인들은 현수막을 게시하려 해도 지정게시대의 공간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다고 호소한다. 반면 행정은 지정게시대가 아닌 곳에 설치된 현수막을 법령 위반을 이유로 철거하고 있다.
물론 불법 현수막을 허용하자는 것은 아니다. 도시미관과 교통안전을 위해 법에 따른 관리와 단속은 필요하다. 그러나 불법을 단속하는 것만큼 불법이 발생하지 않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행정의 책임이다. 주민에게 법을 지키라고 요구하기에 앞서, 합법적으로 게시할 공간이 충분한지부터 살펴야 한다.
이를 위해 하동군에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읍·면별 현수막 게시 수요를 전수조사해야 한다. 지정게시대 수와 실제 게시 면수, 게시 신청 건수, 미배정 건수, 불법 현수막 발생·철거 장소 등을 분석해야 한다. 최근 3년간 자료를 활용하면 게시공간이 부족한 지역과 수요가 집중되는 시기를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둘째, 수요에 따라 지정게시대를 확충하고 위치를 재조정해야 한다. 읍·면마다 똑같은 수량을 설치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인구와 상권, 관광객, 축제·행사 수요 등을 고려해야 한다. 게시 신청이 집중되는 지역은 우선 확충하고, 이용률이 낮은 게시대는 위치 변경이나 규모 확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셋째, 게시 신청과 잔여 공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게시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신청할 수 있다면 주민 편의가 높아지고 행정의 관리 효율성도 개선될 수 있다.
하동군이 2026년 악양면과 적량면의 현수막 지정게시대 설치공사를 추진한 것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이제는 개별 시설 설치를 넘어 군 전체의 게시 수요를 분석하고 중장기 확충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게시공간을 충분히 확보했는데도 법을 위반하는 현수막은 원칙에 따라 단속해야 한다. 그러나 공간 부족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채 철거만 반복한다면 주민과 행정의 갈등은 계속될 수 있다.
행정의 목표는 단순히 불법 현수막을 철거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불법 현수막이 발생하는 원인을 찾아 줄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하동군은 이제 ‘철거 중심 행정’에서 ‘예방 중심 행정’으로 전환해야 한다. 주민에게 준법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한다.
우리 군은 주민들이 법을 지킬 수 있도록 충분한 게시공간을 마련하고 있는가?
물론 현수막 게시공간을 늘리는 것만으로 모든 불법 현수막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합법적인 게시 기회를 확대하는 동시에 위반 행위에 대한 일관된 관리도 병행해야 한다.
하동군 행정의 성과는 현수막을 얼마나 많이 철거했느냐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주민이 합법적으로 게시할 기회는 얼마나 늘었는지, 불법 현수막은 실제로 얼마나 줄었는지도 함께 살펴야 한다.
이제 하동군은 현황 조사에 그치지 말고, 조사·확충·평가로 이어지는 실행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주민에게 준법을 요구하는 행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민이 법을 지킬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행정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것이 갈등을 줄이고 행정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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